제 74주년 광복절을 맞아 민족 시인으로 당대를 살다간 '윤동주' 를 조명하다

[교육정책뉴스 한진리 기자] 지난 8월 15일은 우리 민족이 일본으로부터 해방되어 주권을 되찾은지 꼭 74주년이 되는 날이었다.

최근 연일 한일 양국의 대립이 격화되는 가운데, 독립을 위해 목숨조차 가벼이 희생했던 선열들의 희생이 더욱 값지게 느껴진다. 이에 대표적인 민족 시인이었던 윤동주의 시와 그의 삶을 조명하고자 한다.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ㅣ 윤동주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ㅣ 윤동주

윤동주는 1917년 12월 30일 중국 길림성 화룡현 명동촌(明東村)에서 태어났다. 그가 어린 시절을 보낸 명동촌은 일찍부터 기독교 신앙과 민족 정신을 받아들였던 선구자의 마을이었다.

윤동주 역시 이곳에서 교회를 다니며 기독교 정신을 배웠고 이를 민족주의와 아름다운 자연과 함께 융화시키며 자라났다. 그는 명동촌에서 학교를 다니며 그의 생애 절반인 14년을 보냈다.

1938년 2월 광명중학을 졸업한 윤동주는 연희전문(現 연세대학교)에 입학했는데, 때는 일제가 국가총동원법을 적용해 우리 민족을 전시총동원체제의 수렁으로 몰아넣던 시기였다.
 
그는 연희전문에 몸 담았던 4년간 참담한 민족의 현실에 눈을 떴으며, 이를 자신의 시 세계 속에 녹여내며 괴로워했다.
 
출처: 연세대학교 윤동주 기념사업회 ㅣ릿쿄 대학 시절 뒷줄 좌측 윤길현, 윤동주
 
스믈세햇동안 나를 키운건 팔할(八割)이 바람이다. / 세상은 가도가도 부끄럽기만하드라 / 어떤이는 내눈에서 죄인(罪人)을 읽고가고 / 어떤이는 내입에서 천치(天痴)를 읽고가나 / 나는 아무것도 뉘우치진 않을란다     - 윤동주, '자화상' 中
 
이 때 쓴 '자화상' 에는 전쟁에 광분한 일본 군국주의 체제 속에서 식민지의 지식인이 겪어야 했던 고뇌와 갈등이 짙게 배어 있다.
 
1942년 3월 일본 도쿄 릿쿄대학 영문과에 입학한 윤동주는 이듬해 7월 방학을 맞아 고향으로 돌아갈 준비를 하던 중, 송몽규 등과 함께 일본 특고경찰에 체포되었다.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l 뒷줄 왼쪽부터 장준하, 문익환, 윤동주
 
‘요시찰인’(要視察人, 사상이나 보안 문제 따위와 관련하여 행정 당국이나 경찰이 감시하여야 할 사람) 으로 일본 경찰의 감시를 받던 송몽규와 더불어 조선인 유학생을 모아놓고 조선의 독립과 민족문화의 수호를 선동했다는 죄목이었다.
 
윤동주와 송몽규는 1944년 3월과 4월 쿄토지방재판소에서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각각 징역 2년의 형을 선고 받고, 후쿠오카형무소로 이감되었다.
 
그리고 1년 뒤인 1945년 2월 16일, 윤동주는 원인 불명의 사인으로 차가운 옥중에서 29세의 짧았던 생을 마감하였다.
 
출처: 연세대학교 윤동주 기념사업회 / 연희 전문 시절 친구들과 함께한 윤동주
출처: 연세대학교 윤동주 기념사업회 ㅣ 연희 전문 시절 친구들과 함께한 윤동주
 
이 후 윤동주의 시신을 수습하기 위해 온 그의 아버지가 송몽규를 면회했을 때, 송몽규는 피골이 상접한 모습으로 감옥에서 정체 불명의 주사를 놓아 이 모양이 되었다는 증언을 했다. 이는 윤동주의 죽음이 ‘생체실험’ 때문이 아닌가 하는 의혹을 갖게 하는 대목이었다. 
 
윤동주의 유시는 해방 후 연희전문 시절 후배들이 보관하고 있던 유고와 필사본 등 31편의 시를 모아 1948년 1월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를 출간하면서 널리 알려졌다.
 
28년간의 짧고 강렬했던 그의 생 내내 조국의 아픔에 대해 고뇌했던 시인 윤동주. 정부는 그의 공훈을 기려 1990년 8월 15일 대한민국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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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주년 광복절,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를 노래한 '윤동주' 를 돌아보다
제 74주년 광복절을 맞아 민족 시인으로 당대를 살다간 '윤동주' 를 조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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