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역사편찬원, '광복 이후 서울지역 학생들의 통학과 생활문화' 발간

[교육정책뉴스 이한영 기자] 서울역사편찬원(원장 이상배)은 광복 이후 서울 학생들의 통학 실상을 여러 소주제로 나눠 조명하는 연구서 <광복 이후 서울지역 학생들의 통학과 생활문화>를 발간했다. 

광복 전 초․중급 학생의 통학 실태를 분석한 글을 서두로, 광복 이후 서울지역 국민학교(현 초등학교)의 통학구역(‘학구(学區)’로 약칭) 설정과 위반 문제, 고등학교의 학군(學群)과 통학, 대학생의 통학환경과 대학촌, 청소년 잡지 ≪학원≫을 통해 본 중고생들의 통학과 방과 후 생활, 강남 학군 성립과 관련된 반포주공1단지 아파트 등 총 7편의 논문을 싣고 있다.

 

학교는 학군과 같이 동이나 구 등의 행정 단위와는 또 다른 공간 분할의 근거로도 활용된다. 특히 강고한 학력사회로 불리는 한국에서는 공간 인식의 중요한 매개체가 되어, 심지어는 학교의 존재 여부가 그 주변 주거지의 ‘가치’를 결정하기도 한다. 

대한민국의 수도 서울은 학교를 매개로 한 공간의 위계에서 가장 상위에 있는 만큼, 학교가 공간 인식에 미치는 영향 또한 더욱 크고 노골적으로 나타나게 된다. 그 점에서 학교를 매개로 한 서울 공간의 재인식은 지금까지 시도된 서울의 다양한 재현 방식과는 구별되는 새로운 역사상을 제시할 수 있으며, 그를 가능케 할 소재로서 주목되는 것이 바로 ‘통학’이다. 

 

■ 광복 전 초․중등학생의 통학 실태와 통학로 풍경(박준형, 서울시립대 교수)

1920년대 초 조선에 불어 닥친 ‘향학열’은 철도 인프라를 바탕으로 ‘기차통학’이라는 새로운 일상을 창출했다. 

1939년 기준 기차통학생은 3,104명이며, 이 중 경성 근교가 57%, 인천․수원․개성․의정부 이내가 35%, 그 밖 지역이 8%를 차지했다. 

배차간격이 컸던 당시 기차통학생에게 가장 괴로운 문제는 기차 운행시간 맞추기였다.

경성의 대중교통은 전차 중심이었다. 승객 증가에 비해 증차가 부족해 전차는 1920년대부터 ‘만원’이란 수식어가 붙었다. 

1937년 경성부 전차통학생은 3만 명으로, 통학 때 경성의 ‘러시아워’는 일상이 됐다. 1928년 등장한 버스 역시 ‘만원버스’였다. 경성의 통학난은 학교 위치와도 관련돼 있었다. 각 방면마다 같은 노선을 이용하는 학교들이 몰려 있었고, 통근자와 경로가 겹치는 곳은 더더욱 ‘교통 혼잡’을 피하기 어려웠다.        

사진 출처 = 픽사베이
사진 출처 = 픽사베이

■ 광복 직후 서울의 국민학교 통학구역 설정과 통학환경의 변화(1945~1950)(김태윤, 역사문제연구소 연구원)

광복 이후의 초등 의무교육 추진은 학교 부족을 초래했다. 학교 신설도 있었지만, 교육 재정이 열악해 2부제․3부제 실시는 물론, 일본인학교의 공립학교 전환, 적산(敵産) 건물의 활용 등이 해결책을 제시됐다. 그러나 어떤 대책도 근본적인 해결책이 되지 못했고, 그것은 곧 학생들의 통학난 가중으로 연결됐다. 

통학난이 광복 이후 더욱 심해진 이유는 서울의 인구 급증 때문이었다. 더욱이 1946년 북한의 전기 공급 중단은 전차 중심의 교통체계였던 서울의 교통난을 한층 심화시켰고, 학생들 통학환경 또한 더욱 열악해질 수밖에 없었다. 

여러 회고록을 통해 통학난 경험이 사대문 안 거주 학생과 그렇지 못한 학생들 사이에 큰 간극이 있었던 사실도 확인할 수 있다. 이는 광복 직후의 삶에서 ‘그 당시엔 모두 힘들었다.’는 말로만은 수렴될 수 없는 일상의 격차가 존재하고 있었음을 말해 준다. 

 

■ 1950~1960년대 서울지역 국민학교의 통학구역과 위반문제(최인영, 서울시립대 박사)

6․25전쟁을 통해 국가가 자신들을 보호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경험한 사람들은 학력을 거의 유일한 생존과 계층상승의 수단으로 인식했다. 학력은 노력을 통해 성취 가능한 제2의 신분과 같은 것이었으며, 이를 획득하기 위한 노력은 ‘일류’ 학교에 입학하는 문제로 귀결됐다. 

1950년대는 <교육법>에 의한 초등의무교육의 공식적인 선포(1950년 6월 1일)와 함께 시작됐다. 1950년대 중반에 국민학교의 완전 취학을 달성했는데, 동시에 중학교 입학난이 과열 경쟁 속에 사회문제로 부상하기 시작했다. 1960년대는 그 문제 해결을 위해 도입한 중학교 무시험 전형제, 즉 입학추첨제의 실시(1969학년도부터)와 함께 막을 내렸다. 

이 시기 통학과 관련해 주목할 것은 1957년의 통학구역 개정이다. 개정 원칙은 학생들의 통학 거리를 줄이고 교통수단의 편의와 학교의 수용 능력 등을 고려한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6·25전쟁 당시 종로구 일대는 폭격을 면해 이곳 학교들은 계속해 명문의 지위를 이어갈 수 있었다. 

이에 학부모들은 통학구역의 존재에도 불구하고 이들 명문학교에 자식들을 입학시키기 위해 위장전입과 같은 불법을 서슴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일류’에 대한 열망은 통학구역 제도를 공염불로 만들어 버렸다.  

사진 출처 = 픽사베이
사진 출처 = 픽사베이

■ 1970년대 고등학교의 학군과 통학(이길훈, 서울시립대 연구교수)

1970년대 들어 통학문제에 커다란 변수가 등장했다. 강남개발과 결합된 ‘일류’ 학교들의 강남 이전이 그것이다. 강남개발은 강북억제와 함께 진행됐는데 강북 명문학교의 강남 이전도 그 일환이었다. 그 결과 1976년 경기고를 시작으로 휘문중고, 정신여중고, 숙명여중고, 서울고, 배재중고, 중동중고 등이 차례로 강남으로 옮겨갔다.  

이 글은 ‘일류’ 중 ‘일류’로서 제일 먼저 강남으로 이전한 경기고 사례를 집중적으로 검토했다. 경기고가 강남으로 이전한 1976년은 고교평준화 및 학군제 실시(1974년)로부터 2년 뒤, 고교평준화와 함께 설치된 공동학군의 폐지(1980년)로부터 4년 전에 해당한다. 

이 기간 경기고 졸업생들의 명부를 비교 분석한 결과, 강남 이전 전까지는 종로구와 서대문구를 중심으로 다양한 지역에서 학생들이 통학했으며, 이전 후에도 공동학군에 배정되어 강북에서 원거리 통학하는 학생들이 많았다. 

그러나 시간의 경과와 함께 강남에 거주하는 입학생 및 졸업생 수가 점차 증가했다. 이는 정부가 경기고의 강남 이전으로 의도했던 도심 인구의 강남 이주가 성과를 거뒀음을 의미한다. 

 

■ 청소년지 <학원>과 1960~1970년대 중고등학생의 통학 및 방과후 생활(송은영, 연세대 학술연구교수)

≪학원(學園)≫은 1952년 11월 창간돼 1979년 2월까지 간행된 잡지로서, 일간신문의 발행부수를 능가할 정도로 대중적 인기를 끌었을 뿐 아니라 ≪사상계≫와 더불어 해당 세대에 큰 지적 영향력을 미쳤다. 

≪학원≫은 학생 훈육을 중시하는 청소년지로서의 한계를 지니고 있었지만, 그 한계 속에서도 통학길의 교통지옥과 로맨스, 빵집과 음악감상실, 학원과 과외 등 당시의 중고등학생의 생활문화와 관련된 사실들을 서로 다른 밀도와 시야로 실었다.

≪학원≫에서 추출된 1960~1970년대 학생들의 통학 모습은 일제강점기 시절과 크게 달라 보이지 않지만 차이점도 있었다. 즉 광복 후에는 중고등학교가 각 지역마다 증설됐기 때문에 기차통학생 수가 크게 줄었고, 1960년대 중반 이후 서울의 교통체계가 전차 중심에서 버스 중심으로 바뀌게 됨에 따라, 기차와 같이 남녀학생 전용 칸을 구분해 놓는 일은 사라지게 됐다.

1960~1970년대 많은 학생들이 통학길에 들려야 했던 곳이 바로 ‘학원(學院)’이었다. 1969년 중학교 입시가 폐지되고, 1974년 고교평준화가 실시됐지만, 대학 입시의 높은 문턱은 사교육 성행을 야기했다. 과외와 학원의 성행으로 중고등학생의 통학길은 온갖 감각을 동원해 관찰하는 길도, 버스 안 로맨스를 기대하는 길도 아닌, 바쁘게 과외와 학원을 오가는 길 이상의 의미를 기대하기 어렵게 됐다.

사진 출처 = 픽사베이
사진 출처 = 픽사베이

■ 1950~1980년대 대학생의 통학 환경과 대학촌(오제연, 성균관대 교수)

서울 중심으로 대학이 성장하면서 대학생들도 서울로 몰렸다. 서울에서 자라 자기 집에서 통학하는 학생도 있었지만, 지방에서 서울로 거처를 옮긴 학생들도 많았다. 

‘서울 학생’과 ‘지방 학생’의 비율은 시기마다 조금씩 차이가 있지만 대체로 반반의 비율을 보였다. 친척집에서 통학하는 경우를 제외하면 지방 학생들은 대학 근처의 하숙집, 자취집, 고시원, 기숙사 등에 거주하며 통학했기 때문에 하숙(자취)집은 대학촌의 가장 핵심적인 구성요소였다. 

1950∼1960년대 대학촌의 형성 단계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은 하숙집․자취방과 더불어, 다방․술집․서점 등 상업시설이었다. 이들 공간은 학생들의 소비 공간이자 소통 공간으로 기능했다. 

경제성장과 청년문화 유입으로 1970년대 대학촌에서 다방, 술집은 물론 당구장 등 소비적이고 오락적인 유흥업소가 크게 늘어났다. 술집도 기존의 소주집과 막걸리집 대신 맥주집이 증가했다. 그러나 여전히 이들 공간의 소통기능은 계속 남아 있었다.

1980년대 지속적인 경제성장, 지하철 개통, 졸업정원제 실시, 전자기술의 발전, 학생운동의 성장 등을 배경으로 대학촌에는 몇 가지 변화가 일어났다. 상업화가 더욱 가속화됐고, 전자오락실 등 새로운 오락문화가 등장했다. 

다른 한편에선 복사집을 이용하는 학생이 늘고 사회과학서점들이 들어서 인기를 끌었다. 일견 모순적인 두 경향이 공존하며 함께 강화되었던 것이 1980년대 대학촌의 특성이었다.

통학과 관련해 흥미로운 부분은, 서울로의 인구 유입을 막기 위해 서울소재 대학의 증원을 최대한 억제하는 동시에 서울소재 대학의 지방캠퍼스 신설을 허용하는 정책을 취한 점이다. 

그러나 정책 의도와 달리 서울에서 멀리 벗어나려 하지 않는 대학의 이해와 정책의 가시적 성과를 원한 정부의 이해가 맞물려, 지방캠퍼스는 수도권에 집중됐고 학생 대부분은 서울에서 원거리 통학을 했으며, 그로 인해 서울과 지방간의 또 다른 통학난이 일어나게 됐다.

 

■ 페리의 근린주구론과 강남학군의 성립 및 반포주공1단지(우동선,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

근린주구론은 미국의 도시계획가인 크래런스 페리(Clarence A. Perry)가 1929년에 제안한 이론으로, 초등학교를 중심으로 한 근린단위 구성, 간선도로에 의한 근린의 경계 구획, 토지 이용의 구분과 보도·차도의 분리 등을 핵심 내용으로 한다. 1930년대 이미 한국에 소개됐지만, 1970년대 강남개발 때부터 본격적으로 도시계획에 적용됐다.
 
반포주공1단지는 페리의 근린주구론이 적용된 대표적인 사례다. 반포주공1단지는 대단위 강남개발을 알리는 아파트단지였을 뿐 아니라, 본래 9학군에 속함에도 ‘강남 8학군’ 성립에 일조한 배경에는 바로 페리의 근린주구론에 입각한 단지계획이 있었기 때문이다.

페리의 근린주구론과 그를 수용한 한국 사례 사이에는 차이점도 존재했다. 전자는 초등학교 도보권이 도시계획의 기본단위가 된 데 반해, 후자에서 학교는 주민을 위한 여러 편의시설들 중 하나로 간주돼 단위주거구역 내 고른 분포에 초점이 맞춰졌고, 따라서 초등학교는 근린주구의 중심이 아니라 변두리에 위치하게 됐다는 점이 그것이다.

<광복 이후 서울지역 학생들의 통학과 생활문화>는 서울 소재 공공도서관 등에 무상으로 배포돼 시민들이 이용할 수 있다. 구입을 원할 경우 서울책방에서 구매할 수 있으며, 책값은 1만 원이다. 

다만 현재 코로나19로 인해 서울책방 온라인(https://store.seoul.go.kr)을 통해서만 구매할 수 있다. 12월부터 서울역사편찬원 홈페이지(history.seoul.go.kr)에서도 전자책으로 열람할 수 있다.

 

이상배 서울역사편찬원장은 “이 책의 발간을 계기로 광복 이후 서울지역에서의 학생에 대한 연구가 활성화돼 2천년 서울 역사의 체계화에 기여하기를 바란다.”라며 “앞으로도 더 좋은 ≪서울역사 중점연구≫를 발간하도록 노력할 것”이라고 말했다.

한편, 서울역사편찬원에서는 ‘서울 역사의 취약 분야’를 보강하고 서울 연구자의 저변을 확대하기 위해 ‘서울역사 중점연구’ 발간 사업을 2016년도부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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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역사편찬원, '서울 역사 중점 연구' 발간... 학생 통학의 역사 소개

- 서울역사편찬원, '광복 이후 서울지역 학생들의 통학과 생활문화' 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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