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을 패닉에 빠트린 소련 발 '스푸트니크 쇼크' 에 대한 탐구

[교육정책뉴스 한진리 기자] '스푸트니크 쇼크'(Sputnik Shock).

출처: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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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푸트니크'(Sputnik)는 러시아어로 '반려자' 라는 뜻을 가지고 있으며, 일본의 베스트셀러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스푸트니크의 연인' 에서도 광활한 우주 속에서 파기된 인간 내면 의식을 상징하는 제목으로 등장한다.

옛 소련(소비에트연방)은 1957년 10월4일 카자흐스탄의 한 사막에서 세계 최초로 인공위성 스푸트니크 1호를 발사하는 데 성공했다. 이전까지만 해도 과학기술 분야에서 소련을 압도하고 있다고 믿었던 미국은 엄청난 충격을 받았는데 이를 '스푸트니크 쇼크'(Sputnik Shock)라 한다.

미·소 냉전이 한창이던 당시 니키타 흐루쇼프 소련 공산당 서기장은 “수소폭탄을 실은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을 보유하고 있다”고 장담했다. 미국을 포함한 서방 국가들은 이를 ‘허풍’이라며 코웃음 쳤으나 스푸트니크 1호의 발사 성공으로 이 같은 위협은 현실이 됐다. 핵탄두를 장착한 미사일이 언제든지 미국 본토에 떨어질 수 있다는 공포가 미국 사회를 엄습했다.

미 의회는 정부 대책을 촉구하고 나섰다. 아이젠하워 정부는 1958년 7월 국가항공자문위원회(NACA)를 비롯한 관련 연구소를 통합해 대통령 직속 기구인 항공우주국(NASA)을 발족했다.

그러나 소련은 1961년 4월 첫 우주비행사인 유리 가가린을 태운 보스토크 1호를 발사해 다시 한번 세상을 놀라게 했다. 그해 1월 취임한 이래 최대 위기를 맞은 존 F 케네디 미국 대통령은 5월 의회 연설에서 “10년 내 인간을 달에 착륙시키겠다”고 선언했다. 이 유인 달 착륙 프로젝트가 바로 ‘아폴로 계획’ 이다.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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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SA는 정부의 전폭적인 지원 덕분에 우주 개발에 박차를 가할 수 있었다. 아폴로 계획에만 총 250억달러의 예산이 투입됐다. 당시 한 해 미 연방 전체 예산의 4% 규모로 현재로 환산하면 1660억달러(약 201조원)에 달한다. 마침내 1969년 7월 21일, 아폴로 11호를 탄 닐 암스트롱이 세계최초로 달에 첫발을 디뎠다.

이후 미·소 양국은 1972년 5월 불필요한 경쟁을 자제하고 우주 개발에 상호 협력하는 내용의 ‘미·소 우주협력협정’을 체결했다. 이를 바탕으로 1975년 7월 미국 아폴로 18호와 소련 소유즈 19호가 우주 공간에서 첫 도킹에 성공했다.

한편 ‘스푸트니크 쇼크’는 미국의 수학·과학 교육체계까지 바꿔놨다는 분석도 있다.

당시 미국의 초·중등 교육은 어려운 기초 학문보다 어린이의 창의성과 흥미를 중시하는 진보주의적 교육 성향이 강했다. 하지만 스푸트니크 쇼크 이후 미국의 교육체계 전반에 대한 비난과 자성의 목소리가 커졌다.

이에 1959년 9월 미국에서 '우즈홀 회의'(Woods Hole Conference)가 열리며 기존 교육계에 대한 반성 및 대안을 위한 계획이 시작되었는데, 여기에 기존의 진보주의 교육학자들은 단 한명도 초청받지 못했다. 이는 그만큼 '스푸트니크 쇼크'로 인한 미국 사회 내 교육계에 대한 실망과 비판이 컸음을 반증한다.

제롬 브루너 하버드대 교수를 비롯한 많은 교육학자들이 미국의 교육 기조가 기초과학 발전에 결코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비판했다. 이들의 주장에 따라 미국은 초·중등학교에서 수학·과학 교육을 대폭 강화하는 쪽으로 교육 과정을 개편, 기초학문교육 중심의 성과지향적인 '본질주의 교육' 으로의 대전환의 시대를 맞이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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