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의 본질을 구현 할 수 있는 거시적인 장기 계획이 필요한 시점이다.

대한민국 입시계는 지금 매우 소모적인 논쟁을 벌이고 있다. 교육문제는 모든 사람들의 관심사가 될 수밖에 없기에 그 열기는 계속 더해가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다름 아닌 ‘수능인가? 학종인가?’의 논쟁이다. 모든 논쟁은 사실관계를 잘 파악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논쟁은 사실을 토대로 주장하는 서로 다른 가치에 대한 검토에서 출발해야 한다. 모든 정책의 논의에는 꼭 포함되어야 할 것들이 있다. 예상되는 문제점과 사회에 미치는 파급효과에 대한 면밀한 검토가 그것이다. 특히 교육 정책의 문제는 간단하게 일도양단(一刀兩斷) 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이해당사자가 수없이 많으며, 경제논리처럼 수요공급의 논리로도 설명이 잘 되지 않는다.

교육은 아이들의 미래를 좌우하는 중요한 문제이며 우리 사회의 미래를 도모하는 일이기에 신중하고 본질적으로 접근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특히 이 논란이 이익집단이 처한 입장을 정당화하고 합리성의 근거를 구하는 과정이어서는 결코 안될 것이다.

수능은 이미 수십 년 동안 유지해온 제도로서, 입시에서 중요한 가치인 객관성을 가장 잘 담보하고 있다고 많은 사람들이 믿고 있다. 사실과 가치에 있어서 양보할 수 없는 진영을 구축하고 있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이 진영은 객관성과 공정성을 중요 가치로 내세우며 성적으로 줄 세우기를 서슴지 않고, 경쟁 문화의 효율성을 제일의 가치로 여긴다.

학종의 유용성을 주장하는 이들은 학생의 소질과 적성을 고려한 진로지도가 잘 이루어진다는 점, 학교가 생기 있게 변했다는 점을 주장한다. 하지만 수능과 본고사로 진학한 세대들도 충분히 창의성을 발휘하고 세계적인 성과를 내 왔다는 주장 앞에서는 대응할 수 있는 논리가 빈약한 것도 사실이다. 학생 간 경쟁을 학교 간 경쟁으로 전환하였다는 주장도 한편 일리가 있는 주장이지만 서열화 된 고등학교 체계 앞에서는 공허한 메아리일 뿐이다. 학생의 행복증진과 개개인의 탁월성의 발현과 같은 학종의 가치도 그것이 대학진학에만 목표를 두는 순간 설득력을 잃게 될 가능성이 크다고 할 수 있다.

학종이 수능보다 교육의 본질을 고려한 방법이라는 것을 주장하기 위해서는 학종 준비과정의 용이성을 담보해야 한다. 최상위의 학업성취도를 보이는 학생들은 선발하는 일부 대학에서는 거의 비슷한 내신 성적 보다는 잠재력과 발전가능성 그리고 협업능력을 중요시하는 전형을 선호할 것이다. 하지만 일부 대학을 제외하고는 학종의 준비과정에 피로감을 느끼는 학생들이 있을 수밖에 없다. 이들을 설득할 수 있는 준비과정의 용이성과 간단하게 정리된 정성평가의 규칙들이 공개된다면 좋을 것이다. 하지만 대학은 수요자 중심으로 전형을 유지하기가 쉬워 보이지 않는 것이 현실이다. 입시관계자 외에는 잘 몰라야 하는 일종의 신비주의적인 태도에 더 가까워 보인다.

수능과 학종 각 진영 모두 사실과 가치의 양 측면에서 해소 될 수 없는 주장을 하는 한 논쟁의 끝은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서로 양보하지 않는 한 접점을 찾기가 매우 어렵기 때문이다. 또 양 진영의 사실에 근거한 강고한 논리와 가치는 그 방향을 달리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를 해소하기 위해 선결해야 할 과제는 무엇인가? 먼저 조급증을 가지지 말아야 한다. 급격하게 늘어난 학종의 인원과 비율도 수요자들에게는 피로감을 증가 시킨다. 학종의 방향이 옳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일거에 변화를 완수하려는 태도를 가진다면 더 큰 문제점을 가져 올 수 있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고등학교를 보통교육의 장으로 자리매김 하는데 어떤 제도가 정합적인가?’, ‘모든 학생에게 기회를 평등하게 부여하는 제도는 무엇인가?’, ‘학생 간 경쟁을 학교 간 경쟁으로 전환하는 것에 동의 한다면 고등학교 서열화는 어떻게 해소할 것인가?’, ‘경쟁문화를 피할 수 없는 것으로 인정한다면 그것을 조금이라도 완화시키는 것이 바람직한가?’, ‘무엇이 경쟁적 학교 문화를 완화하는데 도움이 되는가?’, ‘학생의 미래를 도모하는데 대학에 진학하지 않는 학생들에게도 도움이 되는 것이 무엇인가?’ 등이다.

이는 다시 거시적인 문제인 ‘어떻게 고등학교의 학업성취도 산정 방식을 어떻게 바꿔나갈 것인가?’, ‘서열화 된 고등학교 체계를 어떻게 바꿔나갈 것인가?’, ‘학생들의 즐거운 학교생활을 위해 어떤 제도적 장치가 더욱 정합적인가?’ 등이 필히 동시에 고려되어야 한다.

교육을 오랫동안 수행했다고 해서 자신의 경험이 모두 객관적으로 옳은 것이 아닐 수도 있다. 과도한 일반화의 오류 가능성을 늘 살펴야 한다. 다만 자신이 속한 진영의 주장과 논리가 미칠지도 모르는 사회적인 파급 효과와 역기능의 최소화 방안이 무엇인가를 살펴야 한다. 이 시대의 교사가 짊어져야 할 중요한 사회적 책임인 것이다. 또한 일부 언론에서는 무차별적으로 입시의 문제를 파고들기도 한다. 포퓰리즘으로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음을 알면서도 말이다. 또 정치인들은 과거처럼 교육 개혁을 자신의 도약을 위한 발판으로 삼으려 할지도 모른다. 교육이 정치적으로 이용당하지 않도록 그간 노력했어야 함에도 교육을 매번 고양이 앞의 쥐 신세로 만든 기성 교육계는 반성해야 한다. 교육계가 스스로의 영역을 교육적인 채로 지켜 갈 수 있도록 논의와 대안 마련 과정에서 교육 외적인 요소들도 고려해야 한다는 점이다.

현상이 본질을 지배 할 수는 없는 일이다. 본질과 본령에 충실한 현상이 발현되도록 지혜를 모야야 한다. 힘센 권력과 시류에 영합하는 제 세력이 지금까지 우리나라 교육을 이렇게 만신창이로 만들어 놓았다. 스스로를 책임 있는 기성세대라고 여긴다면 그 책임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을 것이다.

다원주의의 시대에 이분법적인 논리로 현상을 바라보는 것 자체가 다른 문제점을 낳게 하는 것이다. 이 또한 경계해야 한다. 이제 부터라도 교육계 스스로 교육을 지켜가고 잘 가꿔가려는 의지를 가지고 바른 교육 풍토를 만들어 가기를 강력히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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